[브로콜리 펀치 (이유리 저)]
1. 리뷰에 앞서,
현대 소설을 읽은 것이 언제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원래 현대 소설을 읽는 것을 참 좋아했는데, 어느 순간 자기 계발을 한 답시고 경영, 경제니 재테크니 하는 책들을 읽다가,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여 자기 계발이니 하는 책들을 읽고, 또 그러다 정신이 피폐해져 가는 것 같을 때에는 고전문학을 읽는 루틴 속에서 지내다 보니, 현대 소설을 점점 안 읽게 되었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아내의 친구로부터 한 현대 소설 책을 빌렸다.
제목부터 심상치가 않다.
'브로콜리 펀치' ... 당최 상상이 되질 않는다.
브로콜리로 후려친 것인지, 펀치가 브로콜리 같은 것인지... 알 수 없는 궁금증만을 가진 채 읽지 않고 있었는데, 아내가 이 책이 재밌다며 꼭 한 번 읽어보라고 해서 읽게 되었다.
2. 따분한 일상 속 발칙한 상상을 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책
이 책은 이유리 작가의 단편 소설 8개를 모은 이유리 소설집이다. 책에는 [빨간 열매, 둥둥, 브로콜리 펀치, 손톱 그림자, 왜가리 클럽, 치즈 달과 비스코티, 평평한 세계, 이구아나와 나]가 수록되어 있다.
나는 각 소설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정리하고, 내가 가장 재밌게 읽은 두 가지 소설을 좀 더 자세히 적어보려 한다.
(1) 빨간 열매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아버지의 유골함에 식물을 심었는데, 어느 날 그 식물에게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난다. 식물인지 아버지인지 모르겠지만, 그 식물은 아버지의 목소리를 내고 있고 아버지의 기억을 지니고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도 식물이 된 아버지와 지내던 어느 날, 나와 비슷한 모습으로 한 식물을 데리고 산책을 하는 남자를 만나게 된다. 그 남자가 데리고 산책하는 식물은 그의 돌아가신 어머니였고, 나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말을 할 수 있는 식물이었다. 나와 그 남자가 가까워지듯, 아버지와 남자의 식물인 그 남자의 어머니도 가까워졌고, 네 명(?)의 사람은 동거를 하게 된다. 나의 아버지와 남자의 어머니라 불리는 두 식물이 점차 가까워져 마치 하나의 식물처럼 지내던 어느 날, 이제는 하나의 식물이 된 줄기에서 빨간 열매가 자라게 된다. 나와 남자는 탐스러워 보이는 빨간 열매가 떨어지자,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반씩 나눠먹기로 한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태몽을 꾼다.
(2) 둥둥
한 아이돌이 길거리 아이돌 연습생 시절부터 월드 투어를 앞 둔 스타로 성장할 때까지 묵묵히 서포트를 해 준 팬이 있다. 그녀는 물질적으로 풍족한 집안 사정 덕분에 그 아이돌을 물심양면으로 도울 수 있었고, 그녀의 노력이 빛을 발한 것인지 이제 그 아이돌은 데뷔 첫 솔로 콘서트만을 앞두고 있다. 아이돌은 무명 시절부터 자신을 도와준 그녀에게 한 가지 부탁을 더 하게 된다. 그것은 아이돌의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는 대마초를 아이돌에게 운반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잘못된 일을 알고 있음에도 자신이 사랑하는 아이돌이 무너짐을 볼 수 없었던 그녀는 아이돌을 위해 대마초를 운반하다, 불의의 사고로 물에 빠지게 된다. 대마초를 숨긴 머핀이 들어있는 캐리어를 붙잡고 물 위에 둥둥 떠있는 그녀는 이제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하나는 캐리어를 붙들고 버티다 구조되어, 자신이 사랑하는 아이돌이 대마초를 흡입하고 있음을 세상에 알려지게 놔두는 것. 또 하나는 캐리어를 열어 머핀을 사라지게 만들고, 자신의 목숨도 사라지게 만드는 것이다. 그 아이돌을 너무나 사랑했던 그녀는 결국 캐리어를 활짝 열어 대마초가 든 머핀을 물속으로 버리고, 물속으로 잠겨버리고 만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그녀는 다시 눈을 떴고, 형체가 없는 목소리가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목소리는 자신들이 외계인이며, 그녀의 아이돌을 향한 순수한 이타심이 연구자료로서 엄청난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녀의 인생을 스캔하는 대가로 한 가지 소원을 이뤄주겠다고 제안을 하고, 그녀는 그 제안을 수락한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소원을 이야기한다. 그 아이돌을 처음 만나 너무나도 행복했던 그때 그 순간으로 다시 돌아가 경험할 수 있게 해달라고.
(3) 브로콜리 펀치
주인공의 남자친구인 원준의 손이 어느 날 아침 브로콜리가 되었다. 너무나도 황당하여, 외과를 가야할 지 내과를 가야 할지 고민을 하는 주인공과 달리, 원준은 너무나도 태연하다. 근처에 있는 병원에 가니, 의사도 흠칫 놀라지만 오랜만에 보는 증상이라며 생각보다 대수롭지 않게 반응한다. 의사를 비롯한 어른들은 원준이 너무 생각이 많고, 고민이 많아 손이 브로콜리가 되었다고 한다. 주인공은 원준에게 고민이 있냐고 물어보고, 긴 침묵 끝에 원준은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한다. 복싱선수인 원준은 복싱을 하기 위해 상대방을 때려야만 했고, 상대방을 때린다는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상대방이 나쁜 사람이라고 스스로 자기 암시를 걸어 상대방을 미워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유 없이 상대방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일을 힘들어하다 결국 손이 브로콜리가 된 것이다. 원준이 손이 브로콜리로 변한 것을 걱정하던 이웃 할아버지는 원준과 주인공, 그리고 이웃 할머니 한 분과 브로콜리로 변한 손이 더 빨리 원상 복구될 방법이 있다고 이야기하며, 다음 날 관악산에 오르자고 한다. 원준의 손이 더 빨리 원상복구 되기 위한 방법은 바로 시원하게 소리를 지르거나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반신반의하며 원준은 산 위에서 그동안 맺힌 응어리를 풀어내듯 애국가를 부른다. 마음의 응어리가 사라진 까닭인지 원준의 브로콜리가 점점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날 원준은 주인공에게 복싱을 관두기로 했다며, 자신의 손을 사진 찍어 보내주었다. 아직 푸릇푸릇하긴 하지만 이제는 완전한 손의 모습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4) 손톱 그림자
불의의 사고로 전 남자친구를 잃고 새로운 남자와 결혼하여 삶을 지내고 있는 주인공에게 세상을 떠난 전남자친구가 반쯤 투명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전남자친구는 주인공에게 자신이 죽은 이후로 어떤 삶을 지냈는 지, 얼마나 슬퍼했는 지를 물어보며 그리웠다고 말한다. 그리고 주인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고, 남이 버린 손톱을 먹고 그 사람으로 변신하게 된 쥐처럼 주인공 근처에 있는 손톱을 통해 변신하여 주인공 앞에 나타나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이 모든 상황이 당황스러운 현재의 남편은 이제 주인공을 보았으니, 되돌아달라고 부탁하지만 전남자친구는 돌아가는 방법을 몰라서 여기에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남편은 일단 회사에 가서 반차를 신청하고 돌아와, 전남자친구가 죽은 장소로 다 같이 가보는 것은 어떠냐고 제안을 한다. 전남자친구가 죽은 장소 인근에 도착하여, 여기인가 저기인가 훑어보던 중, 전남자친구가 사라진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손톱만이 남아있다.
(5) 왜가리 클럽
양미는 고시촌에서 반찬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장사가 잘 되는 듯 싶더니, 어느 순간 매출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양미는 반찬가게를 폐업할 수밖에 없었다. 허망한 마음에 양미는 매일 도림천을 걸었고, 어느 날 도림천에서 송사리 사냥에 성공하는 왜가리의 모습을 경이롭게 쳐다본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한 여자가 다가와 왜가리를 관찰하는 왜가리 클럽에 참여할 것을 권유한다. 얼떨결에 왜가리 클럽의 모임에 참석한 그녀는 그녀에게 참석을 권유한 여자 외에도 다른 여자 2명이 더 클럽의 구성원임을 알게 된다. 그들은 각자의 시선으로 왜가리를 바라보며, 왜가리의 모습에서 경 외로움을 느낀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깨우치고 사냥을 하는 모습, 맺고 끊음을 정확하게 알아내는 모습 그리고 성공을 하던 실패를 하던 같은 모습으로 도전하는 모습. 양미는 망한 반찬가게를 떠올리다 모두의 앞에서 눈물을 흘렸지만, 성공이냐 실패냐 개의치 않고 도전하는 왜가리의 모습을 보고 조금이라도 닮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6) 치즈 달과 비스코티
돌과 이야기 할 수 있는 배 나온 30대 아저씨와 달이 치즈로 만들어져 있으며 자신은 달을 향해 날아갈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남자가 있다. 돌과 이야기할 수 있는 나의 베스트 프렌드는 초콜릿 색 바탕에 흰 점이 박힌 조면암이다 어머니가 만들어주시던 비스코티와 닮아, 스콧이라고 부른다. 스콧은 나에게 언제나 현명한 조언을 해주는 친구이다. 어느 날 어머니의 부탁으로 할 수 없이 정신과 치료를 받던 나는 어쩌다 보니, 월레스와 그로밋을 좋아하는 쿠커라는 사람과 이야기를 주고받게 된다. 쿠커의 나에 대한 관심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새로운 돌을 찾아 떠난 여행에 쿠커를 동행하게 된다. 여행에서 쿠커의 실수로 스콧을 잃을 뻔했지만, 고생 끝에 스콧을 찾고, 쿠커는 나와 한 층 더 가까워졌다고 느꼈는지 달이 치즈로 만들어져 있으며, 자신은 보름달이 뜨면 보름달에 날아갈 수 있다는 비밀을 이야기한다. 나와 스콧은 쿠커를 미친 사람으로 치부하고 웃고 말지만, 그날 밤 나는 보름달을 향해 날아가는 형체를 보며 그게 쿠커임을 알게 되고, 스콧에게 말을 걸지만 더 이상 스콧을 말을 하지 않는다.
(7) 평평한 세계
주정뱅이 아버지의 딸인 나에게 한 쪽 눈이 보이지 않는 새엄마가 생긴다. 아버지가 간경화로 죽어버리고 어쩐지 새엄마와는 친밀하게 대하기 어려운 상태로 지내던 어느 날 내 몸이 반쯤 투명해지더니, 형체가 사라지게 되었다. 형체가 사라진 나는 목소리 마저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나는 투명해진 모습으로 새엄마를 향해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나쁜 소리를 내뱉는다. 그러던 다음 날 내가 학교에 나오질 않자 걱정이 된 담임이 우리 집으로 찾아온다. 새엄마는 내가 투명해진 상태로 옆에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담임에게 나에 대한 악담을 퍼붓는다. 이를 듣다 나는 반쯤 열린 문 틈새를 통해 집 밖으로 나가 버린다. 하루 종일을 투명한 인간으로 살다가 다시 집에 돌아온 나는 집 문이 열린 상태임을 알게 된다. 열린 문 틈새로 들어가니, 새엄마는 애인인지 모를 남자에게 얻어맞은 상태였다. 새엄마의 애인이 떠나고 멍한 모습의 새엄마도 모습이 반쯤 투명해지더니, 이내 나와 같은 형체가 된다. 나와 같은 형체가 돼서야 새엄마는 나를 알아보기 시작하고, 내가 있는 줄도 모르고 나에 대한 악담을 퍼부은 것을 사과한다. 그리고 둘은 서로가 같은 모습 되고서야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8) 이구아나와 나
수영강사인 나는 남자친구인 재호와 재호가 들여온 이구아나와 함께 동거를 하고 있다. 재호가 이구아나를 방치하고 있었기에 이구아나의 이름도 모른 채 적당한 수준에서 이구아나를 관리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재호와 헤어지게 되면서 재호는 자신의 물건을 빠짐없이 가지고 떠났으나, 이구아나만을 남겼다. 나는 재호와 헤어지게 될 경우, 재호가 이구아나를 놔두고 떠날 것을 알고 있었다. 재호 역시 전 여자친구와 헤어지면서 전 여자친구가 이 이구아나를 남기고 떠났으며, 재호의 전여자친구도 전 남자친구가 헤어지면서 남기고 간 것이 이 이구아나였기 때문이다. 재호가 남기고 간 이구아나를 처음으로 제대로 바라보며 쓰다듬던 순간, 이구아나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이구아나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으며, 죽기 전 마지막 소원으로 멕시코에 있는 이구아나의 천국이라 불리는 섬에 가기 위해서 자신에게 수영을 가르쳐 달라고 한다. 수영 강사인 나는 이구아나에게 수영을 가르쳐 주기 시작했고, 자기 전 이구아나와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하며 정들기 시작한다. 시간이 흘러 이구아나는 한강을 왔다 갔다 할 정도로 수영 실력이 늘었고, 떠날 때가 되었음을 이야기한다. 이구아나와 동해안에 도착한 나는 지금이라도 이구아나를 말려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지만, 이구아나의 결연한 모습에 이구아나를 보내준다. 시간이 흘러 어느 날, 나에게 하나의 엽서가 도착한다.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엽서의 한 구석에 무엇인가에 눌린 자국을 발견한다. 이구아나의 발자국임을 알게 된 나는 이구아나가 무사히 도착했음을 알게 된다.
3. 틀에 박혀 따분한 일상에 잠깐의 일탈같은 상상력을 불어넣어 준 책
요즘 참 일이 많기도 많지만 너무 '일'같다. 이 바닥에서 하는 일들이 다 비슷하겠지만, 숫자를 보고 분석하고 보고자료를 만들고 뭐 비슷비슷한 일들이다. 그 와중에 출퇴근을 하며 읽는 책도 재테크니 하는 책들이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정말 지루했던 생활 같기도 하다. 그러던 중 이 책을 알게 되어 읽게 되었는데, 작가가 생각하는 것들이 너무나 신선해서 나의 상상력까지 자극이 되는 느낌이었다.
회색 도시같은 여의도에서 빨간 열매니, 푸릇한 브로콜리 주먹이니 하는 상상은 내 머릿속에서만 일지라도 색깔을 채워주는 기분이 들었다.
추가로, 책의 8가지 소설 중 기억에 남는 것을 하나 꼽자면, 사실 나는 왜가리클럽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왜가리 클럽은 다른 소설들과는 다르게 특이한 상상력이 가미된 소설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내가 고시촌에서 생활을 했었기 때문일 것 같다.
어린 시절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이 성공할 것이라고, 잘 될 것이라고 알 수 없는 자신감에 휩싸여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2년이라는 시간 동안 몸과 마음을 갈아 넣었지만, 실패했고 나는 고시촌을 떠났다.
소설 속의 배경인 도림천도 참 많이 지나다녔기에 더욱 기억에 남았고, 나 역시 그 곳에서 왜가리를 보았기에 해당 장면이 마치 내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듯했다.
지금은 고시촌에서 막 나왔을 때의 힘든 시간은 지났지만, 왜가리 클럽을 읽고 나니 그때의 나도 왜가리의 모습을 보고 성공이냐 실패냐 연연해하지 않는 마음을 가졌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 지나고 난 다음의 이야기지만, 성공이냐 실패냐도 중요한 문제이지만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인 것 같다.
지금도 호연지기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결과나 성취에 연연하는 삶보다는 하루하루의 순간 속에서 내가 느낄 수 있는 최대한의 행복을 찾는 것에 초점을 두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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